
그런 것들 사이, 문득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소파에 앉아 있는 젊은 시절 아버지와, 웬 백인 여자가 함께 찍혀 있었다. 아버지는 약간 야위어 있고, 당시 유행한 듯한 어중간하게 긴 머리카락 때문에 이상해 보였다. 여자는 약간 턱이 각진 편이었지만, 그래도 미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그 사진을 손에 들고 아버지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대학교 3학년 때,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 방랑할 무렵 사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사람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뭔가 뒷사정이 있는 것처럼 말했다. 나는 혹시 하룻밤 함께 보내기라도 한 것인가 싶어 흥미가 동해 캐물었다. [영 기분이 나쁜 이야기라 말이지.] [뭔데, 뭔데? 무서운 이야기야?] [그게 그러니까...] 아버..

나는 그 그림을 '상냥하게 미소짓는 미녀가 그려진 초상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날, 외할아버지와 이야기하다 그 그림 이야기를 꺼냈더니 고개를 갸웃거리시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 말고 다른 사람 눈에는 '무표정하고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그려진 초상화'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내 말이 신경쓰이셨는지, 외할아버지는 그 그림을 판 사람에게 연락해 물어봤다고 한다. 하지만 별다른 사연은 없고, 그저 평범한 보통 그림이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결국 그 때는 그저 내가 다른 사람하고는 보는 눈이 조금 다르다는 결론으로 끝났다. 하지만 엊그제, 외조부모님에게 편지가 왔다. 그림 중 몇개를 친척과 지인에게 나눠주려 하니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가지러 오라는 것이었다. 편지에는 그림 중 몇 개의 사진이 동봉되어..

다시 들으니 사태 파악이 되었다. 혹시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잠깐 들었으나, 이럴 때 약해지면 안 된다. - 이봐요. 미쳤어요? 다짜고짜 무슨 말인가요. 못들은 걸로 할 테니 돌아가세요. - 아니요. 돌아갈 생각은 없고요, 사실 말도 길게 할 생각 없어요. 설명하는 것도 지겨우니까요. - 설명할 게 뭐 있어요? 어서 나가세요. 안 나가면 소리를 지를 거에요. - 안방에서 자는 두 따님이 껠텐데... - 그럼 경.... - 경찰에 전화하는 것도 의미 없어요. - 말도 안 되는 소리 할 거예요? 어서 나가요! - 영희 씨. 어렵고 복잡한 거 아니에요. 그냥 나와 나가서 근처 모텔에서 한 시간만 있다가 오면 되는 겁니다. 당신 삶이 바뀌는 거 아무것도 없고요, 오늘 지금 이 시각이면 아무도 모를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도대체 왜 M군에게 말을 걸었던 것인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때 나눴던 이야기만은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뭘 중얼거리고 있는거야?] [이상한 약속을 했어, 이상한 약속을 했어.] [누구랑 무슨 약속을 했는데?] [약속이니까 말하면 안 돼... 하지만 너는 이사 가는거지? 그럼 괜찮을까?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 버려... 아, 역시 안 되겠어. 약속이니까 말하면 안 돼.] 그리고 M군은 가 버렸다. 그리고 지난 달, 2학년 때까지 다니던 중학교 동창회가 열렸다. 도중에 전학을 가긴 했지만 나한테도 전화가 와서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 하나 보이는 사이, 모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게다가 굉장히 잘생겼다. 나는 친구에게 [저 사람 ..